그리고 그 이유는… 어울락(베트남) 전쟁 후에 수백만 명이 여러 경로, 특히 바다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었는데 그 와중에 많이 죽었고 설사 죽음은 모면했다 해도 간혹 강간이나 강도를 당하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해적들이 귀에서 귀걸이를 바로 갈취해가는 바람에 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기도 했죠. (오) 손에 찬 보석을 강탈하려고 손목을 부러뜨리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그랬어요.
중요한 건 내가 이 남자한테 기분이 상했다는 거예요. 그는 매우 친절했고 신사적으로 내게 정말 잘해줬어요. 다만 첫 질문이 어디 출신이냐는 거였죠. 그래서 내가 불쾌했던 거죠. 감정이 상했죠.
그는 차를 운전 중이었고 난 옆에 앉아 있었는데 비좁게 느껴졌어요. 난 벗어나고 싶었어요. 정말 기분이 상했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큰소리로 말했어요. 나중에 사과를 하긴 했지만요. 하지만 이렇게 말했죠. 『난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아주 좋은 분이에요. 당신에게 그처럼 언성을 높여서는 안 됐어요. 하지만 그 질문에는 이미 수백 번 수천 번 대답을 했어요.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느꼈어요』
무엇보다도 난 어울락(베트남) 출신, 어울락(베트남)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꺼리는 마음이 있었어요. 왜냐면 전쟁이 끝나고 어울락(베트남)에서는 탈출한 수백만 난민이 위태롭고 다 낡아빠진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서 죽거나 약탈과 겁탈을 당하곤 했거든요. 여러 해적들에게요. (아) (오, 세상에)
“Excerpt from the documentary ‘Return to Hell Island’, Reporter(f): 리디아와 함께 떠난 다른 여성은 다른 배로 갔습니다.
Lydia(f): 전 아무것도 모르고 말했죠. 『우린 정말 운이 없어요, 세 번이나 약탈당했거든요』 그런 식으로 말하며 불평을 했더니 이러더군요. 『그게 다예요?』 그래서 말했죠. 『네, 당신은 어땠나요?』 그러자 이러더군요. 『여덟 번이나 약탈당했어요. 여덟 번 약탈에 여덟 번 겁탈당했어요』 전 『네?』 하며 놀랐죠. 그때서야 저도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어요.”
소문에 따르면 그런 해적은 특정 몇몇 나라에서 일부러 풀어 놓은 거라고 했어요. 난민들이 겁을 먹고 자기 나라로 계속 와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요. 물론 엄청난 난민들이 갑자기 들어오니… 그런 아시아 국가들은 기반 시설들을 신속히 마련할 수 없었겠죠. (네, 스승님) 홍콩의 경우엔 난민들이 머물 곳을 바로 마련했지만 당시 모든 나라가 홍콩처럼 부유하진 않았고 그래서 바로 준비하진 못했죠.
필리핀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에 필리핀은 아직 마르코스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거나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이 있었을 거예요. 내가 영부인을 만난 후에 영부인은 유엔에 필리핀이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도울 준비가 됐다고 말했고 또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런저런 지역에 난민들이 지낼 임시 시설을 속히 마련하라고 직접 지시했다고 했어요.
“Supreme Master Ching Hai (vegan) meets with former First Lady of the Philippines, the Honorable Imelda Marcos - Nov. 24, 2006: Supreme Master Ching Hai: 여러분에게 필리핀을 개방한 분이 영부인이에요. 처음으로 그랬던 분이죠. (바탄 난민촌은…) 20일 만에 2만 명을 수용할 곳을 지었죠. (2만 명이요) 20일 만에요. (밤낮으로 작업해서요) 네. (베트남 사람들이 배를 타고 몰려왔으니까요) 네). (우린 크게 우려했죠. 태풍도 있고) 네. (상어에, 악천후 때문에요) 그래서 서둘러야 했어요. 영부인은 20일 만에 지으라고 했어요. 바탄 난민촌을요. 이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죠.
더 얘기해 주세요. 얘기해 주세요. 모두가 알았으면 하니까요.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리처드 머피 주필리핀 미국 대사님과 유엔 관리들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는데 다급하다고 했어요. 베트남 사람들 특히 남베트남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다더군요. 거기서 폭력과 싸움, 살인 행위가 난무해서요)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죠.
(그래서 배를 타고 탈출했고요. 챙긴 물건도 거의 없이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그 얘기를 듣고 이랬어요. 『네. 그럼 받아들이겠어요』 여기로 받아들이겠다면서 물어봤죠. 『첫 그룹은 몇 명이나 되나요?』 그러자 이러더군요. 『1천 명 정도입니다』 다시 『2천 명쯤 됩니다』 그런 식으로 말했죠. 그래서 난민촌을 부랴부랴 마련했어요.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에요. 다만 1천 명을 예상하고 난민촌을 마련했어요. 인간으로서 같은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영광과 특권을 누려서 정말 기쁩니다) 자비로우시네요. 정말 자비로우세요.”
그래서 난 이멜다 여사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에 내가 디자인하고 당시 지니고 있던 보석 장신구를 모두 선사했죠. (아) 내가 어딜 가든 그들은 보석도 많이 가져갔거든요. 당시 그들은 내가 디자인한 의상 같은 걸 내가 모델처럼 직접 입고 착용해서 멋있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서 더 많이 팔려고 했으니까요. 내게 그러더군요. 내가 착용하면 더 빨리 더 많이 팔린다고요. 그래서 늘 내게 그런 걸 착용하게 했어요.
난 키가 작은데 아주 많은 걸 걸쳤어요. 또 보석 장신구는 무겁죠. 모임에서 대중들을 위해 그런 걸 착용하고 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그런 것들을 최대한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조수나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했죠. 『이걸 벗겨줘요. 난 이쪽, 당신은 그쪽을 모두 빨리 벗겨요』 그렇게 많은 걸 걸치고는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가 보석 장신구를 많이 줘서 귀에도 걸고 손이며 목에도 찼었죠. 그때는 전쟁 중이라 만일에 대비한 거죠. (네) 어머니는 『만일 헤어져서 연락이 안 되면 이걸 팔아 살 수 있을 거다』 하셨죠. 하지만 살려고 판 게 아니라 친구들을 대접하려고 팔았죠. 급우들한테 대접하려고요. 난 값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그냥 바보처럼 팔았어요. 상대가 준다는 가격에 그냥 팔았죠. 난 아무것도 몰랐죠. 어머니는 무지 야단치셨죠. 『이걸 어째!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그렇게 팔아버렸니. 1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맙소사』 (아) 그런데도 또 주시면서 『안 팔겠다고 약속해』 하셨죠. 난 『안 팔겠다』고 했지만 전부 팔지는 않겠다고 한 거라며 일부는 또 팔았죠.
알다시피 어릴 땐 그런 게 얼마나 값비싼 건지 잘 모르잖아요. (네, 스승님) 부모님이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벌어 자식을 돌보고 자식을 위해 저축한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요. 그런데 친구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해 주니까 그들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렇게 하는 거죠. (네, 스승님)
자 그래서, 어울락(베트남) 전쟁 후에 수백만 명이 여러 경로, 특히 바다를 통해 탈출을 시도했었는데 그 와중에 많이 죽었고 설사 죽음은 모면했다 해도 간혹 강간이나 강도를 당하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해적들이 귀에서 귀걸이를 바로 갈취해가는 바람에 귀가 찢어져 피를 흘리기도 했죠. (오) 손에 찬 보석을 빼앗기면서 손목이 부러지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그랬어요. (아) (오, 세상에) 혹은 아이들 앞에서 엄마가 강간당하고 남편 앞에서 부인이 강간당하는 식이었죠.
“‘Sea Of Memory – My Dad’s Boat Journey, 1979’ Aulacese (Vietnamese) Boat Refugee Documentary Film Produced by Nam Nguyen and Ryan Nguyen (2011), Nam Nguyen(m): 우린 태국 해적들에게 그날 오후와 저녁 늦게까지 반복해서 공격을 당했어요. 어부였던 해적들이 사롱을 두르고 큰 칼이나 망치나 쇠막대기를 들고서 차례대로 그들의 배에서 우리 배로 넘어왔어요. 해적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고함을 쳤어요. 우리 배는 사람들로 꽉 찼고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이었죠. 젊은 여자와 소녀들은 겁에 질려서 옷을 여러 겹 걸치고 추하게 보이기 위해서 바닥의 기름을 얼굴과 머리에 발랐어요. 해적들은 칼과 망치를 사람들의 가슴이나 목에 겨눴고 우리 몸을 수색하고 우리 옷을 갈가리 찢었죠. 귀, 코, 입, 머리카락을 살피고 은밀한 부위까지도 수색했습니다. 기름과 물이 담긴 컨테이너를 다 비우고 쌀자루도 다 찢었죠. 돈이나 보석을 찾으려고요. 그들은 우리 소유물을 전부 자신들의 배로 옮겼습니다.”
이 모든 얘기는 내가 직접 들은 거예요. 내가 그들을 찾아가고 적십자와 몇몇 난민 수용소에서 일도 했기 때문에 이런 얘기들을 들어 알고 있었죠. 그 당시 내겐 정말 끔찍한 이야기들이었죠. 그 후에 그들이 난민촌에 가게 되면 당연히 보살핌을 받지만 난민촌이 다 같지는 않아요.
“Excerpt from the documentary ‘UNTOLD Vietnamese Boat People Stories: Vietnam History’ (courtesy of Kyle Le Dot Net), Man: 인도네시아 경찰은 몇 가지 베트남 말을 알아 뒀고 가령 오후 3시경이 되면 각 방마다 다니면서 『목욕, 목욕』이라고 했죠. 그런 식으로 알리면 다들 옷을 벗고 시멘트 바닥에 앉았어요. 그럼 지나가면서 각 방에 호스로 물을 뿌렸어요. 한차례 뿌리고 가면 몸에 물기가 있어서 비누가 있는 사람은 그걸로 몸을 씻었고 그러면 잠시 후 그들이 다시 와서 호스로 물을 뿌리면 비누 거품을 닦아냈죠. 그들이 잔인하게 군 이유요? 그건 우리가 겁먹거나 질리거나 정신을 잃게 만들어 베트남으로 송환되는 데 동의하게 하려던 거였죠.”
내가 갔던 일부 수용소에선 난민들을 쓰레기 취급했죠. 그들을 바닥에 앉혀 놓고 고등판무관이 높은 의자에 앉아 끝없이 질문을 해댔죠. 예를 들면 그래요. 해서 난 너무 수치스러웠죠. 어울락(베트남)인이라는 게 그땐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누구든 내게 그 질문을 하면 대답을 회피했어요. 항상 내 국적을 숨기려고 애썼어요. 난 너무 수치스러웠어요. 어울락(베트남) 국적을 가진 게 당시에는 정말로 너무 창피했어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좀 나아졌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썩 좋지는 않아요. 어울락(베트남)인이라는 게 아직도 완전히 좋거나 자랑스러운 건 아니에요. (네. 이해합니다, 스승님)
그 불쌍한 데이트 상대가 그 상처를 건드린 거죠.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었죠. 내가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화를 냈을 때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죠. 『난 상관없어요! 그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그를 사랑하니 돌아가요!』 그는 정말 진심으로 날 생각해 줬어요. 그는 내 처지가 부당하다고 여겼죠. 하여튼 그래서 괜찮았어요. 그렇게 됐고 다시 그를 만나진 않았죠.
그는 이러더군요. 『어떤 이유로 좋은 차가 필요하면 여기 와서 차를 가져다 쓰고 돌려주세요. 차를 안 사도 돼요』 (오, 와) 롤스로이스나 어떤 차든요. (와) 이렇게 말했죠. 『차 쓸 일도 별로 없는데 왜 차를 사나요? (네, 그렇습니다) 여기에 와서 그냥 원하는 차를 써요. 여기 있는 람보르기니를 타도 좋고 포르셰도 좋아요. 롤스로이스도 좋고요』
난 롤스로이스가 좋았어요. 안락했거든요. 기어 변속도 부드럽고요. 그 차는 아주 육중해서 차를 운전할 때 더 안전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람보르기니는 내가 앉아 보니 앞에 있는 게 하나도 안 보였어요. 해서 『도로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운전하죠?!』 했죠. 포르셰도 마찬가지고요. 거의 비슷했어요. 그런 차들은 스포츠 주행, 남자들을 위해 만든 거니까요. (네) 좌석도 아주 낮아요. 도로 바닥에 닿을 정도죠. 그렇게 느꼈어요. 게다가 난 키가 작아서 차에 앉으면 안 보였죠! 밖에 있는 사람은 내가 안 보였고 나도 밖을 전혀 못 봤죠. 도로가 전혀 안 보였어요. 정말 웃겼어요.
그는 『좋아요. 언제든 와서 원하는 차를 하루나 이틀 쓰고 돌려주면 되니 사지 말아요』라고 했죠. 내가 거기에 가서 어떤 차를 사면 좋을지 봤거든요. 어쨌든 그건 아주 짧은 데이트로 끝났어요. 하루도 아니고 저녁에 몇 시간 정도였죠.
사실, 나중에 함께 식사는 했어요. 그는 나 때문에 비건식을 주문했죠. 괜찮은 남자였어요. 괜찮았어요. 내가 말했듯 바깥사람들은 내게 아주 잘해줬어요. 난 해준 게 없었지만요. 그에게 언성을 높였지만 그래도 그는 날 좋아했죠.
그래서 내 안에는 이런 열등감이 있었고 난 늘 똑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것에 좀 지쳐있었어요. 그의 잘못은 아니었죠. 그는 평범한 질문을 했을 뿐인데 평범하지 못한 건 나였죠. 나의 상황과 내 출신이 평범하지 않았던 거예요. (네, 스승님) (이해합니다, 스승님) 그 당시 난 이미 커다란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죠. 난 할 수 있으면 언제나 내 출신을 숨기려 애썼죠. 누구라도 그런 질문을 하면 난 그들과 사이가 틀어져서 곧바로 자리를 피했고 다른 데로 가서 이미 나를 알고 있고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해서가 아니라 관심이 있어 질문하는 거죠. (네, 스승님) 그가 인종차별을 했다면 내게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게다가 원할 땐 언제든 어떤 차든 그냥 쓰라고 했죠. (와) 계속 나를 만나는 것도 아닌데요. (맞습니다) (네) 내가 『오늘은 좀 그랬으니 나중에 다시 만나요』라고 기약한 것도 아니었어요. 아녜요. 이랬죠. 『난 아직 준비 안 됐어요. 미안해요』 그 사람도 알았죠. 그 사람도 알았어요.
그래서 내가 전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화를 냈던 거죠. 내게 이렇게 물었거든요. 『그를 아직도 사랑해요?』 난 『그렇다』고 했죠. 『결혼생활에 만족했나요?』 『만족한 정도가 아니고 최고였어요, 그래서죠』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죠. 『그도 아직 사랑해요?』 난 『그래요!』 했죠. 그는 자기감정이야 어떻든 내게 전 남편에게 돌아가라 했죠 전 남편한텐 사귀는 여자가 있었지만요. 그래서 이렇게 말한 거죠. 『상관없어요! 가요!』
난 말했죠. 『하지만 난 그 여자의 감정을 상관하지 않을 수 없어요. 상처를 줄 수는 없죠. 이번엔 의도적인 게 돼요. 나의 이상 때문이거나 깨달음을 얻어 세상을 구하려는 게 아니고요. 너무 순진한 소리 같지만 난 그때 정말 그랬어요. 난 진심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어요. 그래서 부처가 그랬듯이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남편을 떠난 거예요. 그런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이제 난 이미 어느 정도 깨달았는데 어떻게 돌아가서 다른 사람의 관계를 깨고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남편을 되찾겠어요?』
그러자 그는 『상관없어요』를 멈췄죠. 『그래요, 이해해요. 하지만 참 안됐네요』라고 했어요. 『참 안됐군요. 사랑은 찾기 힘들죠. 그런 사랑은 찾기 힘들죠』 그는 여전히 상처를 안고 있는 듯했죠. 결혼 관계가 깨져서 상처를 입었죠. (네, 스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