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토마스 머튼 신부가 저서 『고독 속의 단상』에서 표현한 깨달음을 주는 지혜를 계속 소개합니다. 이어지는 장에서 소중한 선물인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자비,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것의 중요성을 성찰합니다.
6장
그리스도의 사랑밖에는 참된 영적 생활이란 없다. 오직 우리가 그분께 사랑받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 생활이 있는 것이다. 영적 생활은 성령의 선물과 그분의 사랑을 받는 데 있다. 왜냐하면 예수 성심은 우리가 그분의 성령으로 살기를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성령은 말씀과 성부로부터 나오는 바로 그 성령이며, 곧 성부께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안다면 우리의 모든 가난, 모든 약함, 모든 영적 비참함과 나약함을 지닌 채 그분께 가기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에 대한 그분 사랑의 참된 본질을 이해한다면 가난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그분께 가기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때 결코 우리의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자비 외에는 아무것도 구할 것이 없을 때 고통은 이로움이 된다. 그분의 권능이 우리의 나약함 속에서 완전해짐을 진실로 믿을 때 우리의 무력함을 기뻐할 수 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영적으로 이해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분의 무한한 자비에 비추어 우리의 가난을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난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이 가난은 그분께 매우 귀중하므로, 그분은 우리 가난을 성부께 바치고 우리에게 무한히 풍요로운 자비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께서 타인의 가난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분처럼 자비의 눈으로 다른 이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동정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다른 이들에 대한 참된 자비심을 가질 수 없다.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용서하는 방법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용서받을 수 있음을 기뻐해야 한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우리의 용서다. 서로를 용서할 때 그분이 우리를 대하셨듯이 서로를 대할 수 있다.
7장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자신에게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믿음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구세주에 대한 사랑 안에서 산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올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산다. 희망은 참된 금욕주의의 비결이다. 희망은 우리 자신의 판단과 갈망을 부인하며 현재의 세계를 거부한다.
그것은 우리가, 또는 세상이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선이나 세상의 선을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희망 안에 기뻐한다. 우리는 희망 안에서 피조물들을 즐긴다.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피조물, 약속으로 가득한 피조물을 즐긴다.
만물의 선함은 하느님의 선하심의 증거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은 약속에 대한 그분의 충실성의 보증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한 삶을 약속하셨다. 그분의 약속에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는 모든 극기는 그리스도교적인 극기가 아니다.
『하느님, 당신 십자가에 대한 희망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겸손과 고통과 죽음으로 나를 모든 헛된 희망에서 구하셨습니다. 당신은 현세의 헛됨을 당신 안에서 죽이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영원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습니다. 당신이 가난하신데 왜 내가 부유함을 원해야 합니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된 예언자에게 돌을 던진 이들의 자손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왜 내가 그들의 눈에 유명하고 강력하기를 갈망해야 합니까? 나를 삼켜 버리는 희망, 즉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행복에 대한 희망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절망일 뿐인데도, 왜 내가 그러한 희망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까?
나의 희망은 사람의 눈이 보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눈에 보이는 보답을 믿지 않게 하소서. 나의 희망은 사람의 가슴이 느낄 수 없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가슴의 감정을 믿지 않게 하소서. 나의 희망은 사람의 손이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내가 내 손가락으로 쥘 수 있는 것을 믿지 않게 하소서. 죽음의 손아귀가 느슨하면 나의 헛된 희망은 사라지니, 나의 신뢰를 자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에 두게 하소서. 나의 희망을 건강이나 힘이나 능력이나 인간적 재산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에 두게 하소서.
내가 당신을 신뢰하면 모든 것이 내게 힘이 되고 건강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나를 하늘로 데려갈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신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나를 파괴할 것입니다』
8장
모든 죄는 하느님에 대한 무지라는 최초의 죄에 대한 벌이다. 말하자면 모든 죄는 배은망덕에 대한 벌이다.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이 하느님을 「알았던」 이방인은 그분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을 「알지」 못했다. (로마서 1. 21)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그들을 기쁘게 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그분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을 알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감사로 완전해진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이라는 진리를 체험할 때 그분께 감사하며 기뻐한다. 찬미와 감사의 제사인 성체성사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불타고 있는 용광로이다.
그 희생 제사 안에서 예수께서는 성부께 감사하며,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또 우리를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시고 바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희생 제사 안에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 희생이 무슨 소용인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번제 이상의 것」이다. (호세아 6, 6)
감사하고 예수님과 함께 성부를 찬양하지 않으면 그분을 모르는 것이 된다. 감사와 배은망덕 사이의 중립적 입장은 없다.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곧 모든 것을 불평하기 시작한다. 사랑하지 않는 이는 미워한다. 영적 생활에서 사랑이나 미움에 대해 무관심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무관심처럼 보이는, 미지근한 태도가 혐오스럽게 여겨지며 사랑으로 가장된 미움이다.
하느님의 선하심에 참으로 응답하고 자기가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결코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참된 감사와 위선은 공존할 수 없다. 이 둘은 양립될 수 없다. 감사는 그 자체로 우리를 진실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감사가 아니다. 그러나 감사는 두뇌의 작용 이상이며, 공식화된 단어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것들을 머릿속에서 인지함으로 받은 은혜에 대해 마지못해 감사함에 만족할 수 없다. 감사함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주셨다. 우리의 모든 숨결이 그분 사랑의 선물이며, 우리 존재의 모든 순간이 은총이다.
우리 존재는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은 무엇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무응답이 없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경이에 눈뜨고 하느님의 선하심을 찬미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선하심을 풍문이 아니라 체험으로 알고 있다. 바로 이 사실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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