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신부는 가톨릭의 중요한 신비가, 영적 사상가로서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1915년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닥친 많은 삶의 환경들이 종교와 영성을 탐구하도록 이끌었고 결국 수사가 되어 삶을 신에게 바쳤으며 후에 미국 켄터키주 트라피스트 수도회 겟세마네 수도원의 부제가 됩니다.
또한 수도원의 황야 지역 외딴집에서 홀로 지내길 즐겼습니다. 수도사로 생활 중에 토머스 머튼은 종교적 글을 번역하고 자서전을 집필하며 작문능력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영성,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주제로 시와 책,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머튼의 가장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성자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사실상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아주 투명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신은 이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멋진 얘기나 우화가 아닌 진실입니다』
모든 종교의 평등함을 믿는 토머스 머튼은 만년에 동양의 전통에 깊은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는 또한 14대 달라이라마와 활발한 담화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켄터키주의 토머스 머튼 센터와 국제 토머스 머튼 협회와 다른 단체에서 이 현명한 신부의 삶과 활동을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그의 저서 『고독 속의 명상 』에 묘사된 머튼 신부님의 심오한 사색을 살펴보며, 더 위대한 영적 실상에 관련된 우리 삶의 측면과 그 상호의존성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부: 영적 생활의 단면들, 1장
영적 생활에 있어서 비현실성에 빠지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다. 우리 삶이 외부의 실재와 초월적인 실재와의 생명력 있는 관계에 의해 우리 안에서 지속하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비현실성에 의존할 때 그 삶은 분명히 고갈되어 죽게 될 것이다. 이 무익한 죽음을 생명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참되고 풍요롭고 희생적인 죽음이라고 오인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죽음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자신을 완전한 선물로 내어놓는 것이며, 이는 곧 현실에의 전적인 헌신을 의미한다. 우리가 창조된 사물을 다만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이해관계에만 관련지어 바라봄으로써 오인하게 되는 환영으로 가득 찬 거짓 현실을 포기할 때, 우리를 생명으로 이어주는 죽음이 비로소 시작된다.
물질의 비현실성은 영적인 것의 더 큰 실상에 상대적일 뿐이다. 우리는 피조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피조물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피조물의 실체와 실상과 진실을 꿰뚫어 보는데, 피조물의 이러한 본질은 피조물을 우리 자신의 밖에 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올바르게 바라볼 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사물에 집착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물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다. 사물을 놓아줄 때 그들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그때 그들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사물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때 어둠 속에서 관상의 길을 나설 수 있고, 이 길 끝에서 하느님 안의 사물을 발견할 수 있다.
사막의 교부들은 (사막에 살던 초기 기독교 은둔자) 인간에게 전혀 가치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로 사막이 하느님 보시기에 지극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광야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제공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결코 사용할 수 없는 땅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이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없었고, 인간이 개척할 것도 없었다.
광야는 선택된 민족이 오직 하느님의 보살핌만을 받으며 40년 동안 방황한 장소였다. 이 민족이 약속된 땅을 향해 바로 여행했더라면 몇 달 만에 그곳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또 광야에서 사건을 오직 하느님과 보낸 삶의 목가적인 시절로 항상 회상하도록 계획하셨다.
사막은 다만 그 자체로 창조되었지, 인간이 다른 것으로 변형시키려고 창조되지는 않았다. 산과 바다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막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즉 고독하고 가난하며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자신과 창조주 사이에 어떤 중요한 계획도 끌어들이지 않는 피조물의 필연적인 거주지이다. 이것이 이론적으로는 맞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첫째로 사막은 광란의 장소라는 점이다. 둘째로 사막은 「이집트 북부의 광야」에서 쫓겨나 「이 메마른 땅에 방황하는 악마의 도피처」다. 갈증은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데, 악마는 바로 우월성 안에 안주하여 다른 모든 것을 배척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신의 우월성에 대한 일종의 갈증으로 미쳐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미치지 않도록, 공허와 분노로 가득 찬 불모의 낙원에 사는 악마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사막을 보라, 어떠한가? 오늘날의 사막은 바로 끔찍한 피조물이 새로이 탄생하는 곳으로서 하느님이 축복하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파괴하려고 하는 힘의 시험 장소이다.
인간이 가장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룩한 금세기에 광야는 마침내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더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으며 사막에서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 그곳에 고립과 실험과 악덕으로 보호받는 환상의 도시들을 건설할 수 있다.
사막에서 하룻밤 사이에 솟아나는 번쩍거리는 도시들은 이제 더는 세상을 평화로 밝혀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느님 도시의 형상이 아니다. 이 도시들은 그 옛날, 인간이 「그 이름을 펼쳐 하늘에까지 닿게 하기 위해」 신아르 사막에 쌓아 올렸던 거대한 바벨탑과 유사하지도 않다. (창세기 11, 4)
우리가 이러한 도시들의 성장을 보면서 자기 마음을 정화할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간이 돈과 기계를 사막으로 옮겨 가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악마와 싸우지 않고, 오히려 권력과 부를 주겠다는 악마의 약속을 믿고 그의 천사 같은 지혜를 예찬한다면 사막 자체는 어디로든지 옮겨 갈 것이다.
모든 곳이 사막이다. 모든 곳이 인간이 속죄하고 악마와 싸우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고독의 터전이다. 사막은 절망의 고향이다. 이제 그 절망은 모든 곳에 있다. 우리의 내적인 고독이 패배를 수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가 무언중에 패배에 동의한다면 어느 것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절망은 바닥 없는 심연이다. 절망에 동의하고, 또 동의한 것을 잊으려 함으로써 절망을 막으려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우리의 사막은 절망에 직면해도 결코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희망으로 절망을 극복하는 것이며, 끊임없이 절망과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이 우리의 광야다.
우리가 용감하게 맞선다면 곁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투쟁에 직면하지 않으면 결코 그분을 찾지 못한다.
1부: 영적 생활의 단면들, 2장
기질에 따라 거룩해지고 버림받도록 미리 결정된 것은 아니다. 물론 모든 기질은 파멸이나 구원의 소인이 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질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그분이 오실 때까지 늘려야 하는 재능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힘든 기질을 타고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기질을 잘 이용하고 또 우리의 선한 욕구를 위해 그 기질이 쓰도록 한다면, 기질로 자신을 돕는 대신 기질대로만 행동하는 사람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성 토마스는 어떤 사람의 의지가 선한 것을 좋아하면 그는 선한 사람이며, 악한 것을 좋아하면 악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한 덕스러운 생활에서 행복을 찾으면 덕스러운 사람이며, 죄 많은 생활을 즐거워하면 그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것에 따라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끝마침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작을 보고도 그를 알 수 있다. 주어진 순간에 있는 그대로 됨됨이를 알고 싶다면 시작에서 얼마나 멀리 있고 끝마침에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살펴보라. 그러므로 때로는 본의 아니게 죄를 짓지만 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죄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