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한국어
  • English
  • 正體中文
  • 简体中文
  • Deutsch
  • Español
  • Français
  • Magyar
  • 日本語
  • 한국어
  • Монгол хэл
  • Âu Lạc
  • български
  • Bahasa Melayu
  • فارسی
  • Português
  • Română
  • Bahasa Indonesia
  • ไทย
  • العربية
  • Čeština
  • ਪੰਜਾਬੀ
  • Русский
  • తెలుగు లిపి
  • हिन्दी
  • Polski
  • Italiano
  • Wikang Tagalog
  • Українська Мова
  • 기타
  • English
  • 正體中文
  • 简体中文
  • Deutsch
  • Español
  • Français
  • Magyar
  • 日本語
  • 한국어
  • Монгол хэл
  • Âu Lạc
  • български
  • Bahasa Melayu
  • فارسی
  • Português
  • Română
  • Bahasa Indonesia
  • ไทย
  • العربية
  • Čeština
  • ਪੰਜਾਬੀ
  • Русский
  • తెలుగు లిపి
  • हिन्दी
  • Polski
  • Italiano
  • Wikang Tagalog
  • Українська Мова
  • 기타
제목
내용
다음 동영상
 

『어떻게 내면에서 최고의 잠재력을 얻는가? 질의응답』, 9부

내용 요약
다운로드 Docx
더보기

당신은 말만 할 수 있어요, 『신이여, 당신은 너무‍ 자비롭고 사랑이 넘쳐요. 연민의 정이 넘쳐요』‍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즉 어디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당신을 돕는지, 매일 어떻게 당신을‍ 돌보는지를 안다면, 당신의 말은 진실이고‍ 숭배는 진심이겠죠? 그리고 자신을 그분의 발아래 던져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그게 신께 가는 진정한 길로‍ 종교가 아닙니다. 그건 교리 문제가 아닙니다. 맹신이나 말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보고, 접촉하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명상을 할 때,‍ 심지어 평범한 명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하는 법문은 말할 것도 없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전생을 볼 수 있는데, 모든 세부 사항을 기록하는 일종의 (천국)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그 도서관에‍ 도달하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삶을 펼쳐 놓은 책처럼 볼 수 있어요.

실제로 우리 법문을 수행하면 거기‍ 도달할 수 있어요. 그게 유용하다면 (내면의)‍ 스승이 보여줄 겁니다. 쓸모가 없거나 감당할 수 없다면,‍ 즉 자신의 견딜 힘이‍ 부족하다면, 스승이 그것을 덮어‍ 보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래서 인생의 비밀은‍ 비밀이 없다는 거예요. 올바른 도서관에‍ 도달한 다음 이전과‍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직접 증명할 수 있어요. 스스로 증명할 수 있지만,‍ 남이 증명해 줄 수는 없죠. 가령 어떻게 당신 업장을‍ 증명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이제 이렇게 말할 거예요 -예를 들어 말하니‍ 믿지는 마세요- 『당신은 전생에 호랑이 주민이었어요』‍ 당신은 증거를 요구하겠죠. 당신은 여기, 난 거기에‍ 있으니 설명하기 어려워요. 나는 여러분이 사물을 보는 방식과 달리 봅니다. 5층에 있는 사람은‍ 2층에 있는 사람보다 도시의 더 많은 광경을 봅니다. 2층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5층에 있는 사람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을 겁니다. 그걸 이해하겠어요? (예)‍ 그러니 증거가 있든 없든‍ 나중을 위해 남겨 두세요.

현재의 삶에 더 신경 써야 해요. 가령 과거 생은‍ 바꿀 수 없어요, 지나갔고‍ 이미 벌어졌으니까요. 그래서 우린 바꾸고… 염려할 수 있습니다. 현생과 미래에 대해서요. 이제 우린 미래를 바꿀 수‍ 있고 그건 좋은 일이죠. 우리에겐 과거가 아닌 미래와 현재가 중요해요. 과거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현재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조차 많지 않아요. 하지만 내재한 신의 힘으로‍ 그걸 최소화할 수 있고 순탄하게 만들 수 있죠. 매일 우린 그걸 꺼내‍ 사용합니다. 가령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보물이나 유산, 수백만 달러의 보물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데‍ 그게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고 가정해 보죠. 그리고 당신은 매일‍ 출근해 열심히 일하고‍ 약간의 돈을 벌죠. 하지만 어딘가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이 당신을 도와주진 않죠, 안 그래요? 하지만 어디 있는지‍ 안다면, 꺼내서‍ 매일 쓸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 누군가에게‍ 십만 달러를 빚졌으면 이건 바꿀 수 없어요. 이미 그에게 돈을‍ 빌린 겁니다. 이걸 바꿀 수는 없지만, 당신의 돈을 찾아와 그에게 주면 됩니다. 돈을 빌렸다는 이유로‍ 소송당하거나 사람들이‍ 찾아와 당신을 끌고 나가‍ 욕하고 때릴 필요 없이 더 편하게 살 수 있어요. 그것이 현재의 삶을‍ 바꾸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은 과거의‍ 업장 즉 『뿌린 대로 거두리라』라고 하듯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이나‍ 슬픔은 자신의 과거‍ 행동으로 인해 정해졌어요.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면, 그걸 바꿀 수 없는 것처럼요. 우린 이미 그걸 써서‍ 그것을 감내하거나‍ 만약 돈이 있어서 그에게 준다면‍ 자유로워지겠죠. 마찬가지로 우리 현생은‍ 과거 생이나 지난 세월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비참하거나 불행할 수‍ 있지만, 이제 우리가‍ 수행하고 내적 축복의 힘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어요. 그게 우리가 현재를 돕고‍ 변화시킬 방법이죠. 물론 장래를 바꿀 많은 (영적) 공덕이‍ 저장되어 있기에 미래에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우리 보물을 발견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채권자에게‍ 얼마의 돈을 주고서도 미래에 사용할 많은 돈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되고 가난해지지 않을 수 있죠. 같은 이야기인데,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고‍ 현재는 순탄하게 하며 미래를 바꿔야 해요. 그것이 바로 즉각 깨닫는 법문, 즉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목적입니다. 『관』은 관조, 『음』은‍ 내면의 진동, 내적 (천국의) 소리를 뜻하죠. 그래서 관음은‍ 중국어로 내적 (천국의)‍ 음악을 관조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였죠. 저는 일련정종 불교 수행인‍ 나무묘법연화경을‍ 외우기 시작했어요. 이 둘은 서로 상충하나요? 아버지 이름은 야훼인가요?)‍ 여호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저기 저 신사분입니다)‍ 네, 설명해 주세요. 그녀의‍ 영어가 형편없을 수 있으니‍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당신은 가톨릭 신자라고‍ 하셨죠? (네)‍ 세례를 받았나요? (그리고 이제 막 불교‍ 수행을 시작했어요. 나무는 정종(불교)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 일본 선인가요? (그리고 우리는 나무묘법연화경을 외워요)‍ 아, 네. 일련종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둘이 서로 상충하나요?)‍ 지금 수행하는 불교가 가톨릭과 대립하는지 묻는 거죠, 그렇죠? (맞습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요. 그건 이런 식이죠…‍ (두 번째 계명에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나와 있죠)‍ 맞아요. 맞아요.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은‍ 가장 오래된 책을 통해‍ 야훼로 알고 있어요)‍ 여호와. (그건 영어죠? 다시 말씀해 주세요)‍ 여호와. (야호와 아니면 여호와)‍ 야훼, 그러니 당신은 알고 두려워하고…‍ (저는 원하지 않아요…‍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제 영혼이 최대한 깨닫기 위해서죠)‍ 예. (그리고 저는…)‍ 갈등이 있다고요? (모르겠어요)‍ 나는 이해합니다. 아니 당신은 이해 못 해요. 당신은 이해 못 했어요. 신이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깨달음을 향한 당신의 간절함 때문에 용서하겠죠. 당신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는 건 신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쁜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죠. 나는 소위 『질투하는 신』이 있다고 믿지 않죠.

그러나 어쨌든 이것은 니치렌(일련종)의 수행입니다. 『니치렌』은‍ 중국어로‍ 일련종입니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법화경을 수행하고 있군요. 그들은 법화경의 이름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고‍ 깨달은 바로는 경전의‍ 이름을 암송하는 건 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죠. 신은 경전 속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어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무얼 보셨을까요? 하늘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내면의) 빛을 보셨죠, 아닌가요? 그래요. 따라서 법화경의 이름을‍ 외워도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하면, 잘못된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뜻이죠. 그걸 불교나 가톨릭 수행이라 부르든 상관없죠. 나는 원래 불교도이지만, 대부분의 불교 수행법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모순되기도 하는 걸 알고 있어요. 그들은 단어를 반복하며‍ 말로만 하고- 내적 (천국의) 빛이나 내면의 체험이 없어요.

이제 당신에게 말하건대‍ 가톨릭을 버리지 마세요, 내가 (내적 천국의) 빛을 얻는 법문을 알려 드릴게요. 그러면 됩니다. 나를 숭배하지 마세요. 불교도가 되지 말고‍ 어떤 절에도‍ 가지 마세요. 심지어 내게도 오지 마세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요. 나는 자신에게 들어가 신을 보는 법을 알려줄 뿐입니다. 당신이 원하고 항상‍ 갈망했던, 야훼나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 하나님을 보세요. 그분은 다른 수천 가지의‍ 이름으로 불러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그분은 이름이 없어요. 아시겠어요? (예)‍ 당시 지상에 있는 스승의‍ 이름이 뭐든 그걸 취하죠.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신의 아들로 심지어 신으로 숭배했죠. 부처님이 오셨을 때,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했죠. 신의 힘이 그 사람, 그 인간이란 막대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치 전선과‍ 같아서 내부에서‍ 전기를 운반합니다. 따라서 빨간색이든‍ 노란색이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내부에‍ 전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선이라‍ 할 수 없는 빈 전선이죠. 따라서 온갖 방법이 있어요. 그것이 『전기』를 주지 않는다면, (내적 천국의) 빛이나 신이나 천국의 영역을 바라볼 수 없다면, 그건 빈 『전선』입니다. 그건 『전선』이 아니며,‍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외도죠. 나는 그것이 불교이든‍ 이슬람 법문이든 뭐든 상관없어요. 모두 공허하고 껍데기죠. 그래서 갈등을 느낍니다.

내게 이 법문을 배우면‍ 불교도가 되기 위해 바꿀 필요도 없고 아무것도‍ 암송할 필요도 없어요. 매일 (내적 천상의) 빛을 보고 기쁨을 느끼며‍ 신의 현존 안에 있습니다. 그때 그분이 불러달라고‍ 하는 어떤 이름으로든‍ 그분을 부르세요. 수백 가지 다른 이름이나‍ 이름이 없어도‍ 그분을 아실 겁니다. 그분의 사랑과 자비만을 느끼며, 그분이 매일‍ 세세한 부분까지‍ 당신을 돌봐 주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당신은‍ 신께 정말 감사함을 느끼죠. 당신은 정말 그분을 알고‍ 그분을 경배합니다. 그게 진정한 신의 숭배자죠. 만약 당신이 그분을 모르면, 그건 진정한 숭배가 아니죠. 그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모르며 그냥 『당신은 정말‍ 위대해요, 당신은 정말‍ 자비로워요』 말만 해요. 사실 여러분은‍ 매일 너무 비참해요. 신이 어떤 도움을 주죠?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거짓말해요. 당신은 말만 할 수 있어요, 『신이여, 당신은 너무‍ 자비롭고 사랑이 넘쳐요. 연민의 정이 넘쳐요』‍ 그분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즉 어디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당신을 돕는지, 매일 어떻게 당신을‍ 돌보는지를 안다면, 당신의 말은 진실이고‍ 숭배는 진심이겠죠? 그리고 자신을 그분의 발아래 던져서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그게 신께 가는 진정한 길로‍ 종교가 아닙니다. 그건 교리 문제가 아닙니다. 맹신이나 말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보고, 접촉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정한 도입니다. 내게는 가톨릭의 도, 불교의 도, 연꽃의 도, 백합꽃의 도가 없어요. 오직 하나의 도만 있는데;‍ 그건 신의 도입니다. 만약 당신이‍ (내적 천상의) 빛을 알면, 신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길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어떤 갈등도 느끼지 마세요. 지금 일련종을 믿는다 해도‍ 신은 당신을 벌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은 오직 당신의 헌신과‍ 그분을 향한 맹목적인 추구에 감동할 뿐입니다. 당신의 진정성 때문에‍ 당신을 도울 겁니다. 그래서 그분은 연화경을‍ 암송하거나 경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자각을 통해 그분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나를 보내셨죠.

신께서 당신을 벌하지 않고 당신은 신을 배신한 것이 아니니 중요한 건 진심이죠. 어딜 가느냐보다 마음에 신만 가져가면 됩니다. 오직 그분을 알고 싶어 여기를 오고 저기에 가고, 이 스승에게 저 사람에게‍ 『신을 아세요?』‍라고 묻습니다. 『이리 오세요』라고 해서 당신은 따라갑니다. 그러다 신을 찾지 못해‍ 다시 어려움을 느끼고‍ 다른 길로 가서 『신을‍ 찾는 법을 아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는 『네, 네』라고 하나‍ 이건 공허한 약속일 뿐이죠.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셨을 때, (내적 천국의) 빛을‍ 주신 걸 알아야 해요. 또 예수님 자신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셨을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내면의) 빛을 받으셨죠. 당신은 그걸 보아야 합니다. 그걸 본다면, 당신이‍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한다는 증거입니다. 아니면 모두 잘못된 거죠. 모두 잘못 이해한 겁니다.

사진 다운로드   

더보기
최신 영상
2024-11-09
480 조회수
2024-11-09
238 조회수
2024-11-08
598 조회수
2024-11-08
548 조회수
32:16

주목할 뉴스

2 조회수
2024-11-08
2 조회수
공유
공유하기
퍼가기
시작 시간
다운로드
모바일
모바일
아이폰
안드로이드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GO
GO
Prompt
OK
QR코드를 스캔하세요 ,
또는 다운로드할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선택하세요
아이폰
안드로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