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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머튼 신부(채식인): 도교에 대한 단상, 2부 중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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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사로 생활 중에 토머스 머튼은 종교적 글을 번역하고 자서전을 집필하며 작문능력을 개발했습니다. 『내게 성자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사실상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그가 말하기를 『우리는 아주 투명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신은 이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멋진 얘기나 우화가 아닌 진실입니다』

오늘은 켄터키주의 토머스 머튼 센터와 국제 토머스 머튼 협회와 다른 단체에서 이 현명한 신부의 삶과 활동들을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이제 토마스 머튼의 저서 『동양사상』에서 도교에 관한 내용을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도교는 중국 철학으로 노자가 저술한 영적 고전 문헌인 도덕경에 실린 노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했습니다.

도교에 관한 단상 『이 세상에서 불행이라 여기는 것은 불편한 몸과 힘든 노동,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지 못하고 좋은 옷도 못 입고 볼거리도 없으며 즐거운 음악을 못 듣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허둥대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너무 삶을 염려한 나머지 불안해하며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원하는 것을 가질 때조차 불안해합니다. 바로 그 누리려는 마음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행복인지 아닌지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얻는 방식을 생각해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군중 대다수의 돌진 속에서 그들이 자신을 멈추거나 방향을 바꾸지 못한 채 경솔하고 냉혹하며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행복을 얻는 순간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나로서는 행복이든 불행이든 그들의 기준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행복에 대한 그들 개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자문합니다. 내 의견은 행복 찾기를 멈출 때까지 결코 행복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장 큰 행복은 행복을 얻기 위해 생각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것을 최악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이 말을 고수하겠습니다. 「완벽한 기쁨은 기쁨이 없고 완전한 칭찬은 칭찬이 없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 이 땅에서 도대체 「무얼 해야 하고 무얼 하지 말지」 묻는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결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면 「옳고」 「그름」이 한번에 드러납니다.

대중의 희망에 기대어 행동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에 만족과 행복은 가능해지고 또 무위를 실천한다면 행복과 안녕을 모두 누릴 것입니다. 이렇게 요약합니다. 하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무위가 그 평온함이며, 땅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무위가 그 휴식입니다. 하늘과 땅의 무위가 하나가 되면서 모든 행동이 나오고 만물이 생깁니다. 이 변화는 정말 거대하고 현묘합니다. 만물은 그냥 생깁니다. 그 광대함과 현묘함은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완전한 모든 존재는 무위에서 생깁니다. 그렇기에 말합니다. 「천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런 무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도는 어디에 있는가? 『동곽자가 장자에게 말했습니다. 「도가 어디 있는지 보여 주십시오」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있다네」 동곽자가 주장했습니다. 「도가 있는 곳을 분명히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장자가「개미에게 있네」 「그리 하찮은 곳에요?」 「잡초에도 있네」 「그보다 더 하찮은 곳에도 도가 있습니까?」 「이 기와 조각에도 있네」 「어찌 더 하찮아집니까?」 이때 동곽자가 입을 다물자 장자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대의 질문은 핵심을 잃고 있소. 왜 하찮은 것으로 내려가 도를 찾는가? 하찮은 것에는 도가 더 하찮을까? 도는 만물에서 위대하고, 만물에서 완전하고, 만물에서 보편적이며 온전한 전체라네. 이 세 가지 측면은 다른 것 같지만 실제는 하나이네. 그러니 나와 함께 많은 것들이 하나인 어디에도 없는 궁전으로 가세. 거기서 마침내 우리는 무한과 무극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거라네. 나와 함께 무위의 땅으로 가시게나. 그곳에서 우리는 도가 단순함, 고요함, 초연함, 순수함, 조화와 편안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이름에 나는 무심한데, 그 이름들의 구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네. 거기선 내 뜻에 목적이 없다네. 만약 어디에도 없다면 내가 어떻게 알아차릴까? 그 가고 옴을 알지 못하면 어디서 쉬겠는가? 도는 여기저기 떠돌지만 그것이 어디서 끝날지 모르네. 위대한 무에서 마음은 아직 알지 못하네. 여기서 고차원의 지식은 무한하네.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게 되면 사물의 경계가 없어지네. 그래서 경계에 대해 말할 때 경계가 있는 사물에만 국한하네.

경계 없는 경계를 「완전함」이라고 하고 경계의 무한성을 「공」이라 하네. 도가 이 둘의 근원이지. 그러나 그 자체로는 완전함도 공도 아니네. 도는 생과 소멸을 모두 만들어내지만 생과 소멸을 초월한다네. 도는 존재와 비존재의 원인이지만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네. 도는 쌓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지만 전체나 무도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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