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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기술: 자기 이해를 통한 자유 - 지두 크리슈나무리티(채식인), 2부 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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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영적 인물로 1895년, 남인도에서 태어났으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역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와 영적 교사 중 한 분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어떤 종교나 종파, 나라를 선포하지 않았고, 또 언제나 우리는 우선 인간이고 국적, 인종, 종교적 믿음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1929년부터 1986년, 죽을 때까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많은 청중과 개인, 과학자, 종교인, 작가, 철학자, 교육자와 대화했으며, 또한 라디오와 TV와 인터뷰도 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메시지는 인류에게 철저한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인간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그의 깊은 통찰은 신선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대화하게 했으며, 청중은 자신을 개인적으로 대한다고 느꼈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유일한 관심사는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조건 없는 자유』의 정립이었습니다. 그의 이상은 인류가 스스로 더 심오한 이해와 생활 기술을 갖추고 새롭고 평화로운 세대를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자비로운 채식인이자 사랑받는 크리슈나무르티는 또한 인도와 미국, 영국에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것들은 전인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인간과 환경과, 그리고 그들의 상호 연결된 관계를 중시했습니다. 그 학교들은 생명의 실존과 관련된 장소에 세워졌으며,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또한 수많은 책의 저자였습니다. 그의 저서 중엔 『지성의 일깨움』 『변화의 촉박함』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로부터의 혁명』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서 『생활의 기술』에서 진정한 자유와 미덕의 문제와 또한 이를 경험하는 우리 도전의 근원에 대한 스승의 통찰력을 소개하겠습니다.

배움은 현재다

『지혜는 각자가 발견해야 하며, 지식의 결과가 아닙니다. 지식과 지혜는 함께 가지 않습니다. 지혜는 자기 이해가 성숙할 때 옵니다. 자신을 모르면 질서가 생기지 않고 미덕이 없습니다. 자신에 대해 배우는 것과 자신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지식을 습득하는 마음은 결코 학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런 일을 합니다.

정보 자체를 모으고 경험을 지식으로써 모으는 것이며, 모은 것을 바탕으로 경험하고 배웁니다. 따라서 마음은 사실 배우지 않고 항상 알며 습득하는 겁니다. 배움은 항상 진행 중인 현재이며 과거가 없습니다. 스스로 『배웠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지식이 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모으고 해석할 수 있지만 더 배울 수는 없습니다.

항상 배우는 것은 마음일 뿐입니다. 습득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가 「나」, 자신이라 부르는 이 존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마음뿐입니다. 나는 자신과 구조, 본성, 존재 전체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나의 이전 지식과 이전 경험, 또는 조건부의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의해 흐려진 눈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바라볼 뿐이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배움을 방해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학습과 책, 경험, 또는 교육을 통해 배웁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배움의 방법입니다. 할 것과 하지 말 것, 생각할 것과 생각하지 말 것, 느끼고 반응하는 법을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경험, 학습, 분석, 조사, 자기 성찰을 통해 우리는 지식을 기억으로 저장합니다.

그런 다음 기억은 더 많은 도전과 요구에 반응하여 점점 더 많은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배운 것은 지식으로 기억하게 하고, 그 지식은 도전이 있거나 무언가를 해야 할 때 작용합니다. 이제 나는 완전히 다른 배움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조금 말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고 이 다른 방법으로 배우려면 권위를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지시를 받는 것이고, 들은 것을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권위는 배움을 방해하는데, 배움은 기억으로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은 항상 패턴으로 반응하며, 자유롭지 않습니다. 지식의 짐을 지고 자기가 배운 것에 짓눌린 사람은 절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몹시 유식할지 모르지만, 축적한 지식이 그가 자유로워지는 것을 막아서 그는 배울 수 없게 됩니다』

파괴는 창조이다

『자유로워지려면 권위의 전체 뼈대를 조사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찢어내야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물리적 에너지와 또한 심리적 에너지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갈등할 때 에너지는 파괴되고 낭비됩니다. 그래서 갈등의 전 과정을 이해하면 갈등은 끝나고 에너지가 풍부해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수 세기에 걸쳐 지었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집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파괴는 창조입니다. 우리는 건물이나 사회, 경제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매일 발생합니다만) 이성적이고 개인적이며 심도 있게, 그리고 피상적으로 구축한 심리적, 무의식적, 의식적 방어와 안전을 파괴해야 합니다.

철저히 무방비 상태가 되려면 모든 것을 찢어내야 하는데, 사랑과 애정을 가지려면 무방비여야 하기 때문이죠. 그러면 야망과 권위를 알고 이해합니다. 언제 권위가 필요한지, 어떤 수준인지~경찰의 권위 정도가 필요하며 그 이상은 필요 없음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배움의 권위나 지식의 권위, 능력의 권위는 없으며, 역할이 맡은 권위나 신분이 되는 권위도 없게 됩니다. 구루나 스승의 권위, 다른 이의 권위 등등 모든 권위를 이해하려면 흐리멍덩한 머리가 아니라 매우 예민한 마음과 맑은 머리가 필요합니다』

미덕은 권위가 아니다

『마음이 권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즉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더는 권위에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기계적으로 되는 모방에 종지부를 찍습니다. 어쨌든 미덕과 윤리는 선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적으로 되는 순간 미덕은 사라집니다.

미덕은 겸손처럼 순간순간 되어야 합니다. 겸손은 기를 수 없으며, 겸손이 없는 마음은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미덕은 권위가 없습니다. 사회적 도덕은 도덕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부도덕한데, 사회가 경쟁과 탐욕과 야망을 인정하고 부도덕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미덕은 도덕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미덕 없이는 질서가 없고, 질서는 양식과 공식에 따르지 않습니다. 미덕을 얻기 위해 자신을 단련하고, 공식에 따르는 마음은 스스로 부도덕의 문제를 만듭니다. 마음이 법과는 별개로 신이나 도덕 등으로 객관화시키는 외부의 권위는 마음이 진정한 덕을 이해하려고 할 때 파괴적으로 됩니다. 우리가 따르려고 하는 경험, 지식이 우리 자신의 권위입니다.

우리가 모두 아는 이런 끊임없는 반복과 모방이 있습니다. 법의 권위가 아닌, 질서를 지키는 경찰관의 권위가 아닌 심리적 권위,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권위는 덕을 파괴하게 되는데, 미덕은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겸손을 기를 수 없듯이, 사랑을 기를 수 없듯이 미덕 또한 기를 수 없으며, 그것에 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미덕은 습관적이지 않으며, 미덕이 없다면 명확한 사고를 할 기초가 없는 것입니다』

상투적인 마음은 권위에 묶여 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무수한 종파, 종교, 모든 미신, 두려움에서 자란 조건부의 마음이 그 자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을 낳는 것이 가능할까요? 상투적인 마음은 본래 권위에 묶여 있는 마음입니다. 나는 법적 의미에서 권위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가 의미하는 단어는 전통의 권위, 지식의 권위, 경험의 권위, 안전을 찾고 그 안전에 머무는 수단으로 권위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적이나 내적으로 마음이 항상 추구하는, 항상 안전하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권위는 사상이 스스로 부여한 권위이거나 종교인에게 실체가 없는 신에 대한 종교적 사상일 수 있습니다. 사상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입니다. 신은 허구입니다.

신을 믿을 수 있지만 여전히 신은 허구입니다. 신을 찾으려면 그 허구를 완전히 파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투적인 마음은 겁먹고 야망이 있으며, 죽음과 삶과 관계를 두려워하는 마음이며, 항상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영구적인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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