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고한 신성, 시작 없는 태초
먼저 우리 내면에서 신의 진리의 불꽃을 찾아봅시다. 그 불꽃은 어둠을 밝히고, 예언자가 우리를 불러 『너희 자신을 씻고 깨끗이 하여 악행을 멀리하라』라고 했던 실로암 성수로 보내줄 것입니다. 만일 마음이 비통한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만일 영혼이 악의 구멍을 집어삼킨다면 어두운 슬픔의 늪에서 어떤 빛을 바랄 수 있을까요?
빛이 없는 곳에서 어떤 즐거움과 달콤함을 바랄 수 있을까요? 생명도 즐거움도 없는 곳에 어떤 평화가 있을까요? 신이 없는 곳에 어떤 생명과 평화가 있을까요? 진리의 영과 지배의 영이 없이 어떤 신이 있을까요? 천상의 생각과 청정한 마음이 없이 어떤 진리의 영이 있을까요?
『주의 진리는 모든 세대에 지속한다』는 말처럼 영원함이 없이 어떤 순수함이 있을까요? 물질에 빠져서 잃어버린 것이 어찌 영원할 수 있을까요? 물질을 중시하면서 거기에 빠져서 어찌 그것을 잃지 않을까요? 의지하는 것을 어찌 중시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쓰레기가 소멸함에 슬퍼한다면 어찌 그것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는 『너희는 그들의 마음이 재와 같음을 안다. 그들은 속았으며, 그들 중 아무도 그 영혼을 구할 수 없다』고 적힌 심장을 갖지 않기 위해서일까요? 이는 타락하여 신을 떠나 죄를 짓고 티끌을 숭배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당신은 평화의 산에 올라야 합니다. 구토제를 먹고 마음을 정화하여 낡은 견해를 버리고 그것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나날이 깨끗한 물, 새로운 조언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이것은 산기슭에서 산꼭대기로, 슬픔에서 아름다움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돼지 웅덩이에서 사슴과 영양이 뛰노는 천국의 샘으로 가는 것입니다.
당신 배에서 흘러나온 살아있는 물의 강이 당신의 가장 심한 갈증, 즉 당신의 공허와 불만~ 당신의 질투, 욕정, 권태, 투덜거림, 갈망, 두려움, 슬픔, 회한, 그리고 영혼을 죽음으로 이끄는 이런 모든 악마의 머리에 난 가시가 사라질 때까지 그 물을 마시며 이렇게 노래할 때까지 마십니다.
『영혼이 새처럼 탈출해 흐르는 물을 건너리라』 『복되신 주님은 우리를 그들의 먹이로 주지 않나이다』 하박국의 말씀으로 자신을 위로할 때까지 마시고 노래합니다. 『당신은 악인의 집에서 머리를 빼내어 한숨을 돌리며,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니 나를 구한 하나님 안에 기뻐하리라』
한나와 노래하길 『내 마음이 주 안에 기뻐하네』 다윗과 노래하길 『주님 당신 얼굴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진부한 생각은 가장 강력하고 교활한 적입니다. 복음에 따르면 일단 마음이 거듭나면 이런 힘센 장사를 묶기 어렵고, 그의 의견의 그릇을 사로잡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에 귀중한 평화를 돌려주는 그런 노력보다 무엇이 더 달콤할까요? 날마다 분투하며 그들을 하나씩 버립니다. 매시간 용감하게 산에 올라가며 다윗과 함께 『그것을 버릴 때까지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선언합니다.
친구여, 우리 삶을 충실히 살며 무의미한 날과 순간을 흘려보내요.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주된 관심사는 우리 영혼의 평화, 즉 그 생명, 건강, 구원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영혼을 잃으면 우주를 지배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감히 영혼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귀중하고 유익한 것을 발견할까요?
오, 하나님의 안식과 주님의 축일, 가장 복된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나 연회 중의, 연회가 아니라도 적어도 안식일에 들어가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요. 당나귀가 아니라면 안식일에 우리는 자기 영혼이 가장 고된 허드렛일에서 적어도 절반은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7년 중 7번째나 50년째의 해, 주님의 즐거운 여름에 사람과 짐승에 대한 대사면이 아닐지라도요.
사도들에 따르면 우리의 불쌍한 영혼도 이런 노고에서 조금을 벗어날 것입니다. 『매일 가슴에 슬픔을 담고 내 영혼이 얼마 동안 조언을 얻을까요?』 인간에서 가장 높은 것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인간다운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지엽적이며 예레미야의 가르침처럼 『깊은 것은 인간의 마음이며, 이것이 인간이다. 누가 이것을 알겠는가?』
부디, 깊은 마음이 인간임을 명심하세요. 그러나 영혼이 아니라면 무엇이 마음일까요? 끝없는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이 영혼일까요? 모든 외부의 살과 피와 피부, 그리고 그 밖의 외형적인 것의 뿌리와 씨앗, 알맹이가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이 생각일까요?
자기 마음의 평화를 파괴한 자는 자신의 머리와 뿌리를 파괴한 것입니다. 그는 벌레가 알맹이를 먹고 껍질만 남은, 아무 쓸모 없는 호두 같지 않나요?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이런 메마른 자에게 자비롭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가까이 오라. 너희 마음을 잃고 진리에서 멀어진 자여』
생각은 몸이란 기계 안의 비밀스러운 샘이며, 모든 동작의 머리이자 시작입니다. 바깥의 팔다리는 줄에 묶인 소처럼 이 머리를 따라갑니다. 생각은 불이나 강물처럼 결코 고요하지 않습니다. 그 끝없는 노력이 욕망이죠.
불길은 꺼지고 강물은 흐르지 않을 수 있으나, 물질도 원소도 없으며 조잡한 부패를 지탱하며 죽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생각은 몸의 안이나 밖에 있는 움직임을 한순간도 멈추지 못하며, 무한한 영원과 헤아릴 수 없는 영겁 동안 번개처럼 무수히 날아가며 쉬지 않고 애씁니다. 무엇을 위해 애쓸까요?
생각은 달콤함과 휴식을 찾지만 그 휴식은 시체처럼 조용히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생동하는 성질과 이질적이고 정반대입니다.
생각은 길 위의 여행자처럼 죽은 원소 중에서 자신의 유사성을 찾고 기본적 변화에서 그 갈증을 해소하기 보다는, 강화하며 부패한 물질성에서 지고한 신성, 시작 없는 태초, 또는 이와 비슷한 원칙을 향해 더욱더 빠르게 움직여서 그 광채와 그 은밀한 환시의 불꽃에 의해 정화되며 육신의 흙과 흙으로 만든 육신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그리고 신성한 안식으로 들어가 자신의 모든 부패를 정화하며,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이고 물질의 좁은 한계에서 영의 자유를 향해 날아가면서 그 말씀처럼 『당신께서 나를 큰 방으로 인도하시고 주님이 나를 큰 곳으로 이끄시니, 나는 당신을 독수리 날개 위에 태우고 영접합니다』 이는 다윗의 소망과 같습니다. 『오, 나에게 비둘기 같은 날개가 있으면 날아가 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