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프 왈도 에머슨은 19세기에 유명했던 미국 수필가, 철학자, 강연자, 시인 그리고 초월주의 사상운동의 지도자입니다. 그의 작품은 유명한 작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월트 휘트먼 등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여러 곳에서 강연했고 『자연』과 『에세이집』이 유명합니다. 에세이 『자연』은 자연의 영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우주적 존재』라 부르고 인간 본성과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지금부터 에머슨 씨의 영적이고 과학적 통찰이 담긴 에세이 중 하나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어』
『언어는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세 번째 도구입니다. 자연은 생각의 매개체이며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1. 말은 자연적인 사실의 상징입니다. 2. 특정한 자연의 현상은 특정한 영적 현상의 상징입니다. 3. 자연은 정신의 상징입니다.
1. 말은 자연적 현상의 상징입니다. 자연사를 이용하면 초자연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외적 창조물을 이용해 우리에게 존재들과 내적 창조물의 변화에 대한 언어를 제공합니다. 도덕적 또는 지적 사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모든 말은 그 근본을 찾아보면 어떤 물질적인 것에서 빌려온 것으로 밝혀집니다. 옮음은 직선을 뜻하고 잘못은 꼬인 선을 뜻합니다. 영은 주로 바람을 뜻하고 위반행위는 선을 교차하는 것, 거만함은 눈썹을 올리는 것입니다. 가슴은 감정을 표현하고 머리는 생각을 나타냅니다. 생각과 감정은 감각 있는 존재에서 빌린 말이며 지금은 영적 본성에 적합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 과정의 대부분은 언어가 형성된 먼 옛날에 생겨 우리에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에게 매일 같은 경향이 관찰됩니다. 아이는 명사 또는 사물의 이름만 써서 동사를 표현하고 유사한 정신 행동에 사용합니다.
2. 그러나 영적인 것을 전하는 모든 말의 기원은-언어 역사상 아주 두드러진 사실로-자연에 대한 우리의 작은 빚입니다. 언어만이 상징적이 아니라 사물도 상징적입니다. 모든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의 상징입니다. 자연의 모든 모습은 마음의 어떤 상태에 해당하며 그 마음의 상태는 자연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분노한 사람은 사자, 교활한 사람은 여우, 완고한 사람은 바위, 배운 사람은 횃불입니다. 어린 양은 순진하고, 뱀은 미묘한 악의이며, 꽃은 우리에게 섬세한 애정을 표현합니다. 빛과 어둠은 지식과 무지, 온기는 사랑에 대한 친숙한 표현입니다. 우리 뒤와 앞에 보이는 가시적 거리는 각각 기억과 희망의 모습입니다. 관조 중에 강을 보며 만물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시냇물에 돌을 던지면 원을 그리며 퍼지는 물결은 모든 영향력의 아름다운 예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개인 생명 안이나 이면의 보편적인 영혼을 의식하는데 그 창공 안에서 정의, 진실, 사랑, 자유의 본질이 생겨나고 빛납니다. 이 보편적인 영혼을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누구의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의 것이고 그의 소유이자 사람입니다. 각각의 땅을 감싼 푸른 하늘, 영원한 고요와 영원한 천체로 가득 찬 하늘은 이성입니다. 이것은 지적으로 간주되며 이성이라 부르고 자연과 비교하여 우리는 이것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창조주입니다. 성령은 그 자체로 생명입니다. 그리고 모든 세대와 모든 국가의 사람은 자신의 언어에 조물주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공통점은 우연이나 변덕과 상관없으며 일정하고 보편적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몇몇 시인의 꿈은 아니라 여기저기에 있지만 인간은 유추하고 모든 사물의 연관성을 연구합니다. 그는 존재들의 중심에 있으며 관계의 선이 모든 다른 존재로부터 그에게로 전달됩니다. 개미의 직관은 중요하지 않으며 그냥 개미입니다. 그러나 관계의 선이 개미에게서 사람으로 확장되는 순간 그 작은 일꾼은 감독관으로 보이며 강한 심장을 가진 작은 몸으로 보이고, 비록 최근에 관찰된 결코 자지 않는 그들의 모든 습관은 경외감을 줍니다. 우리가 역사의 초기로 돌아가서 모든 시가 될 때 언어는 그림처럼 더 아름다워지거나 모든 영적 사실은 자연의 상징으로 표현됩니다. 같은 상징이 모든 언어의 첫 요소를 만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모든 언어의 관용구에 가장 중요한 표현법과 강력한 구절들이 서로 유사함이 관찰되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적절한 상징과 연결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의 힘은 그의 성격의 단순함, 즉 진실에 대한 사랑과 낭비 없이 소통하려는 그의 열망에 달려있습니다.
사람의 타락에는 언어의 타락이 뒤따릅니다. 부차적인 욕망이 확산하면서 성격의 단순함과 사상의 주권이 깨질 때 부, 쾌락, 권력, 칭찬의 욕구가 생겨나고 이중성과 거짓이 단순함과 진실을 대신하고, 의지를 해석하는 자연을 넘어선 힘을 어느 정도 잃었습니다. 새로운 표현법을 만드는 것을 멈추고 오래된 말이 그렇지 않은 것을 나타내도록 왜곡됩니다. 금고의 금과 은이 아닌 지폐를 사용합니다. 때가 되면 위조지폐가 나타나듯 말은 이해나 애정을 자극하는 모든 힘을 잃습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들은 이 부패한 어법을 꿰뚫어 뚜렷한 사물에 말을 다시 고정시킵니다. 그래서 생생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진리와 하나님과 같이한다는 당당한 인정을 얻습니다. 우리의 화법이 친숙한 사실의 기준선을 넘어 열정으로 타오르거나 생각으로 고양되는 순간 그것은 심상 안에서 옷을 입습니다. 진지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자신의 지적 과정을 본다면 어느 정도 빛나는 물질적 심상이 모든 생각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에 생기며 그것이 생각의 예복을 제공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글쓰기와 훌륭한 담화는 끊임없는 비유입니다. 이 심상은 저절로 생기며 마음의 현재 행동과 경험의 혼합한 것입니다. 그것은 적절한 작품입니다. 그가 이미 만든 도구를 통해 독자적인 원인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3.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의미를 표현할 때 자연의 사물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언어가 후추 열매의 정보를 얼마나 잘 전할까요? 인간에게 시정 연설의 사전과 문법을 제공하기 위해 그런 고귀한 피조물과 이 많은 형상과 하늘의 많은 천체들이 필요했을까요? 우리는 이 대단한 암호를 사용하여 사소한 일들을 신속하게 처리하지만 아직 그걸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세상은 상징적입니다. 자연의 전체가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에 말의 일부는 은유입니다. 도덕적인 자연 법칙은 거울 안의 모습처럼 물질 법칙에 대한 답변입니다. 『유형의 세계와 그 일부의 관계는 무형의 숫자판입니다』 물리학 원칙이 윤리 법칙을 해석합니다. 따라서 『전체가 부분보다 크다』 『작용과 반작용은 같다』『최소의 무게가 최대의 물체를 들어올리도록 만들 수 있고 무게의 차이는 시간으로 상쇄할 수 있다』 많은 명제들이 물리적 원칙과 함께 윤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명제들을 기술적 사용에 한정하기 보다 인간의 삶에 적용할 때 훨씬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명언과 국가의 잠언은 보통 도덕적 진리의 우화나 그림을 자연적 현상으로 표현합니다. 가령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는다, 손 안의 새 한 마리가 숲 속의 새 두 마리보다 낫다, 화창할 때 건초를 만들어라, 가득 찬 잔은 들고 다니기 힘들다, 오래 사는 나무는 뿌리를 먼저 내린다 등이 있지요. 원래의 표현은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는 유추에 의해 그 가치를 알고 반복해 말합니다. 잠언의 진리는 모든 동화, 우화 및 비유의 진리입니다. 마음과 물질의 이런 관계를 일부 시인은 좋아하지 않지만 신의 뜻에 맞기에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운이 좋아 우리가 이 기적을 숙고할 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때는 왜 이걸 몰랐는지 의심합니다. 『어떻게 이런 것이 있지? 여름날의 먹구름처럼 느닷없이 엄습해 오는데 놀라는 사람이 나뿐이라니』 왜냐하면 우주가 투명해지고 그것보다 더 높은 법칙의 빛이 그걸 비추기 때문입니다.